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퐁트누아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경과 == 5월 11일 새벽 5시, 국본군은 전투 준비를 완료했다. 영국 좌익 보병대와 합세한 컴벌랜드 공작은 프랑스군의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앞서 보낸 정찰병들로부터 베리 숲과 퐁트누아 사이에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국본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한동안 논의한 끝에 네덜란드군이 퐁트누아와 앙토잉 마을을 공격하는 사이 영국 여단이 새로 발견한 길을 따라 침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삭스 원수가 짜놓은 함정이었다. 컴벌랜드 공작은 토마스 대장에게 제12 근위대와 제12, 13 보병대, 화이트워치 하이랜드 연대, 바바리안 보병대를 이끌고 영국군 우익을 겨냥하고 있는 프랑스 측면을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잉골즈비는 명령에 따라, 프랑스군이 샹보나스 요새로 부르던, 프랑스 포병 진지를 향해 진군했지만 배리 숲에서 프랑스 경보병대[* 이들은 그라생의 화승총병대(Arquebusiers of Grassin)라는 이름의, 바로 전해에 창설된 신설 부대로, 경보병, 척탄병, 기병의 합동작전을 통한 산병전에 특화된 엘리트 부대였다.]의 강한 저항을 받은데다가, 그 후방에는 영국군에게는 보고되지 않은 또다른 포병 요새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첩보와는 다른 적의 배치로 인해 상대의 규모를 예상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전면 공격을 주저하게 된다. 이때 휘하의 화이트워치 하이랜드 연대 지휘관 로버트 먼로 경은 일부 병력을 파견해 먼저 적을 숲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진언했다. 잉골즈비 준장은 그의 충고가 일리 있다고 여겼지만 대포가 올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얼마 후, 컴벌랜드 공작의 명령을 받든 미켈슨 중위가 16파운드 짜리 대포 30문을 가지고 와서 잉골즈비 준장과 합세했다. 이후 잉골즈비는 포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적 포병진지를 향해 진격했지만, 적군이 숲에서 총 세례를 퍼붓는 바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잉골즈비 준장은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작전을 성사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컴벌랜드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컴벌랜드 공작은 이를 받아들여 그쪽 방면의 공세를 중단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중앙에서 진행될 주공을 맡은 존 리고니어 경에게 알리지 않는 우를 범한다. 오전 7시, 인내심을 잃은 컴벌랜드 공작은 측면이고 나발이고 무작정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퐁트누아, 앙토잉, 그리고 스켈트 강 건너편의 진지에 설치된 프랑스 포병대의 집중 포화에 직면한 기병대는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고, 네덜란드 포병대가 출격해 프랑스 포병대를 향해 사격했다. 오전 6시 30분, 제임스 준장이 영국군 15개 기병 분대를 이끌고 베존에서 전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국과 하노버 보병대의 주요 진군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영국군 기병대 역시 적 포병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패퇴했고, 켐벨 중장은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후 존 리고니어 경 휘하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베존에서 출격해 프랑스군 진영의 바로 앞 평원까지 나아갔다. 프랑스 포병대는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3파운드 짜리 영국 대포 7문이 이에 맞서 적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오전 9시, 영국, 하노버 보병대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리고니어 경은 잉골즈비 준장이 아군 우익 방면에 포격을 가하는 적을 제압해주길 희망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별 소식이 없자 [[제프리 애머스트]] 대위를 잉골즈비 준장에게 파견해 왜 아직도 진군하지 못했는지 물어봤다. 얼마 후 잉골즈비로부터 컴벌랜드 공작이 나머지 영국 보병대와 연계하여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접한 리고니어는 그들이 진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잉골즈비는 이 전투 후, 프랑스 요새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에 넘겨졌지만, 본인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컴벌랜드로부터) 받은 지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항변이 받아들여져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군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한편, 좌익 방면에서는 발데크 왕자가 지휘하는 네덜란드 보병대가 퐁트누아와 앙토잉을 공격하기 위해 대열을 형성해 진군했지만, 요새화된 두 마을에서 퍼붓는 대포 세례로 인해 격퇴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컴벌랜드 공작과 쾨니세크 원수는 적 대포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퐁트누아에 대한 추가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를 잉글즈비의 여단에서 차출하여 퐁트누아에 대한 공격에 투입시키기로 했다. 이후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는 퐁트누아로 접근했지만 실패했고, 네덜란드군의 추가 공세 역시 프랑스 드래곤 부대의 좌측면에서의 역습으로 패퇴했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더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오 무렵, 컴벌랜드 공작은 영국과 하노버 보병대에게 고원의 적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프랑스군의 포격 세례를 감수하며 적을 향해 접근했고, 6파운드 짜리 대포 12문이 적의 포격에 맞서 대응사격을 퍼부었다. 얼마 후,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적 보병대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했다. [[볼테르]]에 따르면, 이때 영국군 근위대 지휘관 찰스 헤이 경이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라고 말하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은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직후 영국군 보병대가 먼저 사격을 개시해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본다. 확실한 사실은 프랑스군의 일제사격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영국군의 일제 사격은 7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 보병대의 전열이 흐트러졌고, 영국, 하노버 연합군은 기세를 타 적진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때 루이 15세는 전투를 직접 살펴보려고 최전선에 가 있었는데, 아군이 뿔뿔히 흩어지고 적이 쇄도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피하시라는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삭스 원수는 국왕의 무모한 행동에 경악해 급히 최전선으로 달려와 예비대를 이끌고 적을 막게 하면서 루이 15세의 안부를 확인했다. 삭스 원수로부터 적을 격퇴하라는 지시를 받은 아우베테르 연대는 즉각 출격해 영국-하노버 보병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적을 도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삭스 원수는 프랑스군 기병 연대를 출격시켜 영국, 하노버 보병대를 공격하게 했지만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기병대가 악전고투를 벌이는 사이 후방에서 보병대를 집결시켜놨고, 이후 프랑스 보병대는 아일랜드 연대, 스위스 연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아일랜드 여단은 중앙의 영국 부대를 공격했고, 스위스 근위대는 좌익의 하노버군을 공격했다. 이후 한 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인 영국, 하노버 보병대가 적의 기세에 눌러 밀려나기 시작하자, 삭스 원수는 그동안 아껴두고 있던 메종 드 루아 기병대를 투입했다. 메종 드 루아는 [[데팅겐 전투]]에서 저지른 실책을 만회하고자 무지막지한 공세를 감행했고,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컴벌랜드 공작은 이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친히 전장으로 달려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될 수 있는 한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철수시키고자 노력했고, 프랑스군은 적을 격퇴한 것에 만족하고 더이상 쫓지 않았다. 이리하여 퐁트누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